백두대간사람들 22 함백산- 광부들을 용도폐기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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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강 댓글 0건 조회 221,038회 작성일 18-08-28 12:10본문
백두대간 준령이 용의 몸짓으로 북쪽 하늘을 오른다. 남쪽 하늘 아래에는 태백산이 넉넉한 품을 잔뜩 벌리고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이제 막 길을 떠나는 낙동정맥 봉우리들은 행여 동해 창파에 하늘이 젖을까 염려스러운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하늘을 떠받치느라 여념이 없다. 그런 함백산이 서쪽으로 터놓은 물길 동남천이 한강으로 향하는 길목에 탄광촌 고한이 있다. 89년 석탄산업합리화가 실시되기 전까지만 해도 가난을 유산으로 상속받은 이들에게는 기회의 땅이었던 곳이다.
“원래 1년만 일해 목돈을 쥐면 나가려고 했다 아닌교, 근데 여직 이러고 있는 기라요.” 고한에 들어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진관(50·태백광업소)씨와 같은 생각으로 갱에 발을 디뎠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그들의 재산은 튼튼한 몸이 전부였다. 함백산을 뺑 둘러 수십개가 넘는 탄광은 그들을 조국근대화를 이끄는 산업전사라며 환영했다.
일자리가 잠자리보다 많았던 시절인지라 고한의 급한 비탈에까지 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1330m라는 만항재에는 평화촌이니 새마을이니 하는 마을이 생겼다. 고려 유신들이 이씨 조선의 녹을 먹지 않겠다고 찾아 들었다는 첩첩산중 두문동에도 지붕이며 벽 모두를 슬레이트로 꾸민 집들이 들어섰다. 먹을 물과 화장실도 없는 그런 방 한 칸이 서울의 웬만한 방보다 더 비싼 월세를 받았지만 아무도 싫은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워낙 방이 부족해 집주인에게 밉보이면 꼼짝없이 한뎃잠을 자야만 했던 탓이다.
시커먼 물이 흐르는 동남천을 낀 언덕에는 기계로 찍어낸 것 같은 똑같은 작은 집들로 빼곡이 채워졌다. 번듯한 아파트도 들어섰다. 이런 사택을 얻기 위해 ‘빽’이 동원되고 관리인에게 넌지시 술값을 건네야만 했던 시절은 고한의 호시절이었다.
계속 될 것만 같았던 호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개도 1만원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우스개는 90년대를 맞으면서 신화가 돼버렸다. 석탄산업합리화 사업은 무서웠다. 그 많은 석탄광산들이 경쟁력이 없다는 이유로 값비싼 채탄장비까지 내버려둔 채 문을 닫았다. 고한에서만 40여개가 넘던 광산들은 (주)삼탄만 남고 모두 사라졌다. 87년 3만2천여명에 달했던 인구가 해가 다르게 줄기 시작했다. 인근의 사북과 합쳐 시로 승격될 것이라는 소문은 그야말로 일장춘몽이었다.
붐비던 시장은 파리조차 날리지 않는 죽은 시장이 됐고 3교대라는 근무 특성 때문에 늘 흥청대던 술집들도 굳게 닫은 문을 좀처럼 열지 못했다. 빽까지 써야 입주할 수 있었던 사택들은 텅텅 비어 가기 시작했다. 한때 400 남짓하던 두문동의 세대수도 이제 50여세대만이 남았다. 아예 사라져버린 동네들도 있다. 겨울이면 돈뭉치를 싸들고 탄을 구하기 위해 고한읍에 진을 치던 연탑업자들의 발길을 다시 구경하지 못하게 될 때쯤인 95년 사북과 고한 사람들은 무리져 머리를 깎았다. 고한과 사북지역에서 유지급에 속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고한과 사북이 지도에서 사라질지 모른다는 우려감은 당시 안면도에서 주민과 마찰을 빚던 핵폐기장을 유치하겠다는 데까지 나갔다. “군부대를 주둔시켜 달라, 대학을 유치해 달라” 등의 요구는 상업에 기반을 둔 지역주민들의 이해는 대변할 수 있었지만 일자리를 지켜야 하는 광산노동자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석탄산업만큼 고용효과를 가져올 대체산업이 지역에 들어오기 전까지 감산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 정도가 광산노동자들의 주목을 끈 것이었다. 감산중지는 더이상 해고도 폐광도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주)삼탄만 하더라도 합의 당시 118만t이던 생산량이 97년 56만3천t으로, 98년에는 36만t으로 줄어들었다. 올해 목표는 32만t이다. 석탄생산이 150만t으로 최고조였던 86년 2800여명에 달하던 (주)삼탄의 직접고용노동자 숫자도 99년에는 488명으로 줄었다. 직영의 몇 배에 이르는 노동자를 고용했던 하청업체와 조광업체는 (주)삼탄에는 단 한 곳도 남아 있지 않다.
“200년 뒤 얼굴이 까만 사람들이 태백지역을 살리고, 그 100년 뒤에는 얼굴이 하얀 사람들이 들어온다.” 정암사와 태백지역에 전한다는 <정감록> 이야기다. 98년 7월에 설립된 카지노사업을 주도할 강원랜드(주)가 지난 4월 고한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52명 직원들의 하얀 얼굴을 비결 속에 나오는 하얀 얼굴로 여기는 듯했다.
강원랜드는 자본금 1천억원 가운데 51%는 석탄합리화 사업단과 강원도, 정선, 태백, 영월 등 지방자치단체가 출자하고 나머지 49%는 주식공모로 충당한다고 한다. 액면가 5천원인 주식의 공모가는 1만8500원으로 예정돼 있다. 강원지역의 언론들은 카지노사업이 독점이고 장래성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황금주’로 보도하고 있다.
물놀이 시설과 골프장, 스키장과 카지노 호텔을 짓는 본 사업에 앞서 2001년 고한 박심지구에 스몰 카지노가 들어선다고 한다. 고한과 사북지역에는 관광도시에 걸맞은 도심을 꾸미기 위한 도로확장과 을씨년스러운 빈 사택을 철거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그러는 와중에 사택이 아니고서는 오갈 데가 없는 재해노동자나 노인들이 거리로 밀려나게 될까 두려워 하고 있다.
재해노동자인 이병삼(44)씨도 사택을 비워 달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화를 삭이지 못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11살된 아들에게 괭이를 들리고 농사를 가르칠 정도로 이씨의 사정은 다급하다. “96년 머리를 다쳤어요. 98년 병원문을 나섰는데 돌아온 것은 장애퇴직이었어요. 근데 등급이 14등급이래요. 200만∼300만원이나 보상비로 나올라나 모르겠어요.” 자신은 이미 병들고 아이들은 어린 데다 그나마 큰 아이는 뇌성마비라고 한다. “저 놈이 학교에서 회장이에요. 공부를 참 잘해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장애아인 제 형 대소변까지 가려 줄 정도로 착하고요. 그런데 내가 얼마나 살지 모르겠어요. 내가 죽으면 저 놈은 어쩐대요.” 나이가 어려 어디 취직도 못할 텐데 농사짓는 법이라도 가르쳐야 제 가족을 간수할 것 아니냐는 것이 이씨의 걱정이다. 지금 이씨가 아들에게 고랑을 파고 씨를 뿌리는 법을 가르치는 밭도 지난해에만 해도 사택단지였다. 이씨가 아들과 함께 씨를 뿌리지만 수확은 미지수다. 4차선 도로가 들어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89년 시작된 석탄산업합리화 사업과 광산지구 정비 사업에 투입된 자금은 매년 5천억원을 오간다고 한다. 광산노동자들은 어림잡아도 5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이 돈이 어디에 쓰였는지 모른다고 한결같이 말한다. 재취업 교육을 받거나 권유받은 적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석탄생산을 줄일 때마다 톤 당 5만여원씩 지급되는 감산지원금도 어디로 갔는지 노동자들은 알지 못한다.
2010년까지 총 1조원의 자금이 투여될 카지노사업이 고한과 사북의 모습을 바꾸는 데 기여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광산노동자들에게 어떤 혜택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신을 갖고 답을 하지 않는다. 전체고용인원 가운데 30%를 지역 주민에 할애할 방침이라고는 하지만 그 지역은 강원도 전체를 의미한다. 남아 있는 광산노동자들의 평균 연령은 40대 중반이다. 이들이 재취업할 수 있도록 하려면 지금부터 교육을 하더라도 젊은 인력과 경쟁하기에는 어렵다.
함백산에는 요즘 폐광들의 흔적을 가리고 복구공사가 한창이다. 굴삭기의 큰 삽이 흙을 쏟아낼 때마다 폐석더미에서도 뿌리를 내리는 들꽃들이 사라져 간다. 굴삭기 큰 삽에 카지노 간판이 겹쳐지고 맥없이 스러지는 들꽃에 희망마저 막장에 묻어버린 광산노동자들의 무표정한 얼굴이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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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탑 은탑은 어디에 있을까?
함백산 가는 길
함백산에 가려면 일단 정선군 고한읍까지 가야 한다. 승용차로는 제천까지 가서 38번 국도나 31번 국도를 탄다. 안내판이 잘돼 있어 길을 찾는 데 어려움은 없으나 굴곡과 경사가 심하니 조심해야 한다. 대중교통은 기차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태백선이 고한을 지나는데 새마을 열차도 정차한다. 역 바로 앞에 버스터미널이 있고, 거리가 짧은 편이라 택시요금도 그리 비싸지 않다. 지방에서는 거리에 따라 할증이 붙는다는 것도 명심하자.
함백산에 오르려면 38번 국도 두문동고개(싸리재라고도 한다)에서 시작하거나 정암사 앞을 지나 31번 국도 화방재를 잇는 만항재 정상 부근에서 시작한다. 비좁지만 승용차도 오를 만한 시멘트 포장도로가 정상까지 나 있다. 정상 부근의 국가시설에는 일반인 접근이 금지된다. 만항까지는 시내버스가 다니고 두문동재는 태백을 가는 시외버스를 이용한다.
볼거리
천년고찰인 정암사는 5대 적멸보궁 가운데 하나다. 다른 적멸보궁과 달리 현판에는 적멸궁이라고 적혀 있다. 자장율사가 금탑과 은탑에 보물을 숨기고 비장했다는 전설이 전하고 국가보물인 수마노탑과 열목어 서식지도 볼거리다. 두문동은 두문동고개를 오르기 직전에 있다. 예전에는 커다란 무덤과 비석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미 폐교된 학교를 짓느라 헐어내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고한과 태백일대는 최고로 꼽히는 볼거리가 여럿 있다. 두문동고개는 국도 가운데, 망항제는 포장도로 중에서, 함백산 오르는 시멘트 도로는 자동차로 오를 수 있는 곳 중 가장 높은 곳이다. 태백시의 추전역도 국내에서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기차역이다.
출처: http://100mt.tistory.com/entry/백두대간사람들-21-함백산-광부들을-용도폐기-말라 [<한겨레21> 신 백두대간 기행 블로그]
“원래 1년만 일해 목돈을 쥐면 나가려고 했다 아닌교, 근데 여직 이러고 있는 기라요.” 고한에 들어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진관(50·태백광업소)씨와 같은 생각으로 갱에 발을 디뎠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그들의 재산은 튼튼한 몸이 전부였다. 함백산을 뺑 둘러 수십개가 넘는 탄광은 그들을 조국근대화를 이끄는 산업전사라며 환영했다.
일자리가 잠자리보다 많았던 시절인지라 고한의 급한 비탈에까지 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1330m라는 만항재에는 평화촌이니 새마을이니 하는 마을이 생겼다. 고려 유신들이 이씨 조선의 녹을 먹지 않겠다고 찾아 들었다는 첩첩산중 두문동에도 지붕이며 벽 모두를 슬레이트로 꾸민 집들이 들어섰다. 먹을 물과 화장실도 없는 그런 방 한 칸이 서울의 웬만한 방보다 더 비싼 월세를 받았지만 아무도 싫은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워낙 방이 부족해 집주인에게 밉보이면 꼼짝없이 한뎃잠을 자야만 했던 탓이다.
시커먼 물이 흐르는 동남천을 낀 언덕에는 기계로 찍어낸 것 같은 똑같은 작은 집들로 빼곡이 채워졌다. 번듯한 아파트도 들어섰다. 이런 사택을 얻기 위해 ‘빽’이 동원되고 관리인에게 넌지시 술값을 건네야만 했던 시절은 고한의 호시절이었다.
계속 될 것만 같았던 호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개도 1만원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우스개는 90년대를 맞으면서 신화가 돼버렸다. 석탄산업합리화 사업은 무서웠다. 그 많은 석탄광산들이 경쟁력이 없다는 이유로 값비싼 채탄장비까지 내버려둔 채 문을 닫았다. 고한에서만 40여개가 넘던 광산들은 (주)삼탄만 남고 모두 사라졌다. 87년 3만2천여명에 달했던 인구가 해가 다르게 줄기 시작했다. 인근의 사북과 합쳐 시로 승격될 것이라는 소문은 그야말로 일장춘몽이었다.
붐비던 시장은 파리조차 날리지 않는 죽은 시장이 됐고 3교대라는 근무 특성 때문에 늘 흥청대던 술집들도 굳게 닫은 문을 좀처럼 열지 못했다. 빽까지 써야 입주할 수 있었던 사택들은 텅텅 비어 가기 시작했다. 한때 400 남짓하던 두문동의 세대수도 이제 50여세대만이 남았다. 아예 사라져버린 동네들도 있다. 겨울이면 돈뭉치를 싸들고 탄을 구하기 위해 고한읍에 진을 치던 연탑업자들의 발길을 다시 구경하지 못하게 될 때쯤인 95년 사북과 고한 사람들은 무리져 머리를 깎았다. 고한과 사북지역에서 유지급에 속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고한과 사북이 지도에서 사라질지 모른다는 우려감은 당시 안면도에서 주민과 마찰을 빚던 핵폐기장을 유치하겠다는 데까지 나갔다. “군부대를 주둔시켜 달라, 대학을 유치해 달라” 등의 요구는 상업에 기반을 둔 지역주민들의 이해는 대변할 수 있었지만 일자리를 지켜야 하는 광산노동자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석탄산업만큼 고용효과를 가져올 대체산업이 지역에 들어오기 전까지 감산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 정도가 광산노동자들의 주목을 끈 것이었다. 감산중지는 더이상 해고도 폐광도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주)삼탄만 하더라도 합의 당시 118만t이던 생산량이 97년 56만3천t으로, 98년에는 36만t으로 줄어들었다. 올해 목표는 32만t이다. 석탄생산이 150만t으로 최고조였던 86년 2800여명에 달하던 (주)삼탄의 직접고용노동자 숫자도 99년에는 488명으로 줄었다. 직영의 몇 배에 이르는 노동자를 고용했던 하청업체와 조광업체는 (주)삼탄에는 단 한 곳도 남아 있지 않다.
“200년 뒤 얼굴이 까만 사람들이 태백지역을 살리고, 그 100년 뒤에는 얼굴이 하얀 사람들이 들어온다.” 정암사와 태백지역에 전한다는 <정감록> 이야기다. 98년 7월에 설립된 카지노사업을 주도할 강원랜드(주)가 지난 4월 고한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52명 직원들의 하얀 얼굴을 비결 속에 나오는 하얀 얼굴로 여기는 듯했다.
강원랜드는 자본금 1천억원 가운데 51%는 석탄합리화 사업단과 강원도, 정선, 태백, 영월 등 지방자치단체가 출자하고 나머지 49%는 주식공모로 충당한다고 한다. 액면가 5천원인 주식의 공모가는 1만8500원으로 예정돼 있다. 강원지역의 언론들은 카지노사업이 독점이고 장래성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황금주’로 보도하고 있다.
물놀이 시설과 골프장, 스키장과 카지노 호텔을 짓는 본 사업에 앞서 2001년 고한 박심지구에 스몰 카지노가 들어선다고 한다. 고한과 사북지역에는 관광도시에 걸맞은 도심을 꾸미기 위한 도로확장과 을씨년스러운 빈 사택을 철거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그러는 와중에 사택이 아니고서는 오갈 데가 없는 재해노동자나 노인들이 거리로 밀려나게 될까 두려워 하고 있다.
재해노동자인 이병삼(44)씨도 사택을 비워 달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화를 삭이지 못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11살된 아들에게 괭이를 들리고 농사를 가르칠 정도로 이씨의 사정은 다급하다. “96년 머리를 다쳤어요. 98년 병원문을 나섰는데 돌아온 것은 장애퇴직이었어요. 근데 등급이 14등급이래요. 200만∼300만원이나 보상비로 나올라나 모르겠어요.” 자신은 이미 병들고 아이들은 어린 데다 그나마 큰 아이는 뇌성마비라고 한다. “저 놈이 학교에서 회장이에요. 공부를 참 잘해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장애아인 제 형 대소변까지 가려 줄 정도로 착하고요. 그런데 내가 얼마나 살지 모르겠어요. 내가 죽으면 저 놈은 어쩐대요.” 나이가 어려 어디 취직도 못할 텐데 농사짓는 법이라도 가르쳐야 제 가족을 간수할 것 아니냐는 것이 이씨의 걱정이다. 지금 이씨가 아들에게 고랑을 파고 씨를 뿌리는 법을 가르치는 밭도 지난해에만 해도 사택단지였다. 이씨가 아들과 함께 씨를 뿌리지만 수확은 미지수다. 4차선 도로가 들어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89년 시작된 석탄산업합리화 사업과 광산지구 정비 사업에 투입된 자금은 매년 5천억원을 오간다고 한다. 광산노동자들은 어림잡아도 5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이 돈이 어디에 쓰였는지 모른다고 한결같이 말한다. 재취업 교육을 받거나 권유받은 적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석탄생산을 줄일 때마다 톤 당 5만여원씩 지급되는 감산지원금도 어디로 갔는지 노동자들은 알지 못한다.
2010년까지 총 1조원의 자금이 투여될 카지노사업이 고한과 사북의 모습을 바꾸는 데 기여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광산노동자들에게 어떤 혜택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신을 갖고 답을 하지 않는다. 전체고용인원 가운데 30%를 지역 주민에 할애할 방침이라고는 하지만 그 지역은 강원도 전체를 의미한다. 남아 있는 광산노동자들의 평균 연령은 40대 중반이다. 이들이 재취업할 수 있도록 하려면 지금부터 교육을 하더라도 젊은 인력과 경쟁하기에는 어렵다.
함백산에는 요즘 폐광들의 흔적을 가리고 복구공사가 한창이다. 굴삭기의 큰 삽이 흙을 쏟아낼 때마다 폐석더미에서도 뿌리를 내리는 들꽃들이 사라져 간다. 굴삭기 큰 삽에 카지노 간판이 겹쳐지고 맥없이 스러지는 들꽃에 희망마저 막장에 묻어버린 광산노동자들의 무표정한 얼굴이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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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탑 은탑은 어디에 있을까?
함백산 가는 길
함백산에 가려면 일단 정선군 고한읍까지 가야 한다. 승용차로는 제천까지 가서 38번 국도나 31번 국도를 탄다. 안내판이 잘돼 있어 길을 찾는 데 어려움은 없으나 굴곡과 경사가 심하니 조심해야 한다. 대중교통은 기차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태백선이 고한을 지나는데 새마을 열차도 정차한다. 역 바로 앞에 버스터미널이 있고, 거리가 짧은 편이라 택시요금도 그리 비싸지 않다. 지방에서는 거리에 따라 할증이 붙는다는 것도 명심하자.
함백산에 오르려면 38번 국도 두문동고개(싸리재라고도 한다)에서 시작하거나 정암사 앞을 지나 31번 국도 화방재를 잇는 만항재 정상 부근에서 시작한다. 비좁지만 승용차도 오를 만한 시멘트 포장도로가 정상까지 나 있다. 정상 부근의 국가시설에는 일반인 접근이 금지된다. 만항까지는 시내버스가 다니고 두문동재는 태백을 가는 시외버스를 이용한다.
볼거리
천년고찰인 정암사는 5대 적멸보궁 가운데 하나다. 다른 적멸보궁과 달리 현판에는 적멸궁이라고 적혀 있다. 자장율사가 금탑과 은탑에 보물을 숨기고 비장했다는 전설이 전하고 국가보물인 수마노탑과 열목어 서식지도 볼거리다. 두문동은 두문동고개를 오르기 직전에 있다. 예전에는 커다란 무덤과 비석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미 폐교된 학교를 짓느라 헐어내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고한과 태백일대는 최고로 꼽히는 볼거리가 여럿 있다. 두문동고개는 국도 가운데, 망항제는 포장도로 중에서, 함백산 오르는 시멘트 도로는 자동차로 오를 수 있는 곳 중 가장 높은 곳이다. 태백시의 추전역도 국내에서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기차역이다.
출처: http://100mt.tistory.com/entry/백두대간사람들-21-함백산-광부들을-용도폐기-말라 [<한겨레21> 신 백두대간 기행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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